2025년 5월 28일 개봉한 영화 <페니키안 스킴>은 특유의 정형화된 미장센과 건조한 유머를 고수해 온 웨스 앤더슨 감독이 인간관계의 복잡성과 통제의 환상에 대해 심도 깊게 접근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일생일대의 프로젝트를 완수하려는 재벌 사업가와 그의 딸이 펼치는 인간적, 감정적 여정을 그려내며, 스타일과 내러티브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고자 한 시도입니다. 무엇보다 독특한 비주얼과 정서적 감동이 공존하는 ‘앤더슨식 성숙’의 결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웨스 앤더슨이 만든 사업가의 서사: 자자 코다의 세계
<페니키안 스킴>은 여섯 번의 비행기 추락 사고와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은 ‘자자 코다’라는 인물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는 재계의 전설이자 통제광적인 사업가로서, 자신의 평생 숙원인 ‘페니키안 스킴’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 외동딸 리즐을 상속자로 삼고 그녀를 본가로 불러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움직임은 자자 혼자 계획하고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들로 인해 점점 삐걱거리기 시작합니다. 앤더슨 감독은 이 서사 구조를 통해 인간의 삶이 얼마나 예측 불가능하며, 통제할 수 없는 사건들이 우리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시사합니다. 자자가 벌이는 투자 협상은 성공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새로운 난관의 연속이며,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들, 예를 들어 딸 리즐이나 친척인 누바르, 힐다와의 관계에서 더 큰 혼돈과 갈등을 겪습니다. 이 같은 서사는 앤더슨 특유의 유머와 절제된 감정선으로 그려지며, 관객에게 묘한 불편함과 묵직한 현실감을 동시에 제공합니다.
2. 자자와 리즐의 거리: 부녀의 감정선은 어떻게 좁혀지는가?
자자와 리즐의 관계는 이 영화의 핵심 감정 축입니다. 초반부 두 사람은 철저히 거리감을 유지합니다. 자자는 비즈니스 중심의 대화만을 시도하고, 리즐은 아버지에게 서운함과 경계를 감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화가 중반을 지나며 이들은 점차 서로를 이해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발전합니다. 앤더슨은 그 과정을 매우 섬세하고 우회적으로 묘사합니다. 직접적인 대사나 사건보다는, 두 인물이 함께 식사를 하며 나누는 짧은 대화, 혹은 협상 자리에서 보이는 태도와 눈빛을 통해 관계의 진전을 암시합니다. 리즐은 점점 자자의 단단한 외피 안에서 그가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 채 살아온 남자임을 인식하고, 자자는 딸이 단순히 후계자가 아닌, 자신보다 더 유연하고 명료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이들의 서사는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적으로 깊어지고, 통제에서 신뢰로 변모하는 과정을 조용히 보여줍니다.
3. 조연 캐릭터들의 생동감: 감정의 퍼즐을 완성하다
<페니키안 스킴>은 중심 서사 외에도 조연 캐릭터들의 매력이 넘쳐납니다. 자자의 비서 역할을 하던 인물이 갑작스레 사망하거나, 예기치 않은 사기극에 휘말리는 동업자 등 다양한 인물들이 영화의 리듬을 이끌어 갑니다. 특히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힐다’는 냉소적이지만 인간적인 면을 드러내며 부녀 갈등의 또 다른 축을 담당하고,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맡은 ‘누바르’는 자자와의 협상 테이블에서 예측 불가능한 반응을 통해 극의 긴장감을 높입니다. 이외에도 미카엘 세라, 제프리 라이트, 김희원 등 수많은 배우들이 짧은 분량 안에서 각자의 존재감을 분명히 드러내며, 영화의 풍성함과 완성도를 높여줍니다. 이 캐릭터들은 자자와 리즐이 맞닥뜨리는 ‘외부 세계’로서 기능하며, 감정적으로나 상징적으로 두 인물의 변화와 성장을 더욱 명확하게 대비시켜 줍니다.
4. 미장센과 연출: 완벽한 화면 속 불완전한 사람들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단연 시각적 미장센입니다. <페니키안 스킴> 역시 앤더슨의 시그니처 스타일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대칭 구도, 파스텔 톤 배경, 건조한 공간감 속에서 유려하게 흐르는 카메라 움직임은 이번 작품에서도 관객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주목할 점은 그 스타일이 과거보다 덜 과시적이라는 것입니다. 감정이 중심이 되는 장면에서는 고정된 시점 대신 인물의 눈높이에 맞춘 카메라 워크가 적용되고, 조명 또한 한층 부드러워졌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등장인물들의 내면 변화와도 절묘하게 맞물리며, 영화가 단순한 스타일을 넘어 감정의 깊이를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5. 영화가 던지는 철학: 통제와 불완전함의 역설
영화 <페니키안 스킴>은 단순히 이야기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자자 코다라는 인물은 통제와 질서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끝까지 그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그리고 그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이 진짜 성숙임을 말해줍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이 됩니다. 아무리 완벽하게 계획된 시스템이라도, 삶은 언제든 예외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잔잔하게 드러냅니다. 앤더슨 감독은 이번 작품을 통해 단지 미장센의 거장이라는 타이틀을 넘어, 철학적인 스토리텔러로서의 입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킵니다. 삶의 통제 불가능성,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감정의 진정성을 말없이 전하는 방식은 관객에게 묵직한 울림을 남깁니다.
6. 평점 및 총평: 웨스 앤더슨의 성숙한 성장 선언
이번 <페니키안 스킴>은 웨스 앤더슨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가장 균형 잡힌 작품 중 하나입니다. 시각적 미장센과 감정 서사, 캐릭터들의 매력, 그리고 통제와 자유에 대한 철학까지 다양한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다만, 한꺼번에 등장하는 많은 캐릭터와 경제적 담론이 관객에게는 다소 피로하게 느껴질 수 있고, 전작에 비해 독창적인 구성력에서는 조금 아쉬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불완전함 속에서 진정한 성숙을 찾는다'는 메시지를 견고하게 전달하며, 관객에게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 평점: ★★★★ (4.0/5) – “완벽한 것보다 진짜를 꿈꾸는 영화”